
『망가진 태양』
0.
그리운 꽃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겨울에 피는 꽃이라 했다. 그걸 누가 가르쳐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만히 꽃에 손을 대자마자 송이 째로 툭 아래로 떨어졌다. 바라보고 있으니 꽃잎 안쪽이 흡사 태양의 테두리처럼 보였다. 진분홍색 꽃이었다. 꽃술 부근은 주홍 노랑 흰 빛을 띠었다. 흔히들 아름다운 얼굴을 꽃 같다 라고 말하지. 그렇다면 꽃송이는 인간의 머리인 걸까. 뚝 하고 물 한 방울이 떨어져 쓰러진 얼굴에 맺혔다. 비인가 했더니 눈물이었다. 이유도 모르는 채 서러워 울었다. 심장에서부터 끌어온 눈물이라 그칠 줄을 몰랐다. 하수구 안 같은 이 세상이 눈물에 잠겼다. 나는 죽은 꽃과 함께 바닥에서 흔들렸다.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살이 썩어 점점이 흩어져 날아간다. 수면 위로, 멀리멀리. 이대로 죽어간다. 평온한 죽음. '그럴 자격이 있어?' 말한 것은 나일까 꽃일까 또 다른 무엇일까. 그 말이 맞아. 모든 게 내 탓이니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런 꿈을 꾸었다. 의식이 들자 이동하는 차 안이었다. 자세를 바꾸려 하니 맞은 데가 욱신댔다. 별 생각 없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꽃은 뭐였지. 아, 아카네 누나가…….
순간 창 밖의 검은 형체가 시야를 스쳤다. 빠르게 지나쳤는데도 왠지 선명하게 보였다. 불탄 듯한 검은 발, 검은 다리.
'아카네 누나?'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는 채 급히 차창에 달라붙어 지나온 곳을 돌아봤다. 거기엔 순간 본 것과 비슷한 그 무엇도 없었다. 잠시 후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으며 코코노이 하지메는 그저 잠이 덜 깬 것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1.
눈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그날 잘못 맞았나? 아니, 당일엔 문제 없었는데. 시야 가장자리에 거무스름한 얼룩이 점점이, 둥글게, 꼭 잉크 방울이 유리판 위에 떨어져 흩어진 것처럼 퍼져 있다. 때론 증식한다, 때론 괜찮다……, 완전히 없어지진 않는다.
안 그래도 시력이 나쁜 편인데 곤란하다. 거기다가 정신적으로 피곤해 눈에 초점도 잘 잡히지 않는다. 종일 거의 누워만 있는다. '이래서야 폐인' 이라고 코코노이 하지메는 한탄했다. 지금 몰골도 꼭 그렇다. 엉망진창인 몸과 얼굴로,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 낯선 장소에서……, 아니, 이젠 여기가 내 자리인가? 천축. 이자나의 붉은 나라.
눈을 감으면 아직 그날 창고 풍경이 떠오른다. 이누피의 표정, 타케미치의 외침. 둘 다 무사하겠지,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나는 곧장 차에 탔기 때문에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타케미치는 내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인 것 같지만……, 너무 대책 없잖아?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던 거겠지, 이누피는. 똑같은 녀석들이다. 비슷비슷한 것들끼리 어디론지 모를 데로 흘러가겠지. 그런 건 질색이야. 나는, 이기는 게 중요하다. 감정 같은 거, 없어도 상관 없잖아? 지킬 수 있다면, 책임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바보 이누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코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그렇게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걱정스러운 건 너니까. 난 알아서 잘해.
"밥이랑 약이다, 코코노이."
천축 특공복 차림의 누군가가 바닥에 물건들을 내려놓고 곧장 나갔다. 문 잠그는 소리. 얼굴은 모른다. 보지도 않았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봐봤자 누군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잠그지 않아도 도망치지 않을 텐데. 그런 약속이었잖아. 아직 답을 못 내기도 했고.
'답이 필요해?'
아카네 누나?
순간 놀라 누운 채로 고개만 돌리자 온통 얼룩지고 흐릿한 속에 새카맣게 타 버석버석 부서지는 발과 종아리가……. 아니다. 아무 것도 없다. 뚫어지게 계속 보아도 역시. 고요한 방 안엔 나와 해질녘 볕과 볕이 들지 않은 구석의 어둠 뿐이다.
코코노이 하지메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생각만 많아지고 결국 뭐가 뭔지 모르게 됐어. 이젠 환청까지. 인간이 되자. 밥을 먹고, 상처를 소독하고, 거즈를 갈고, 뇌를 제대로 가동시키자.
2.
여기 있으니 알 필요 없는 정보를 자꾸만 알게 된다. 간부들은 번갈아가며 들어와 수다를 떨든 침묵 하든 시간을 보내고 나간다. 매번 바깥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 때때로 낮게 말하는 소리도 들린다. 보초도 있나보다. 두어 명? 도망치지 않을 테니 방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이렇게 가둬만 두니 점점 미쳐가는 것 같다고 호소하자, 이자나에게 말해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후로 감감 무소식. 이자나는 내가 완전히 복종할 때까지 압박할 모양이다. 간부들이 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무섭게 노려만 보는 건 괜찮은데, 정보가 너무 많다……, 수다쟁이들은 피곤하다. 거들먹거리는 수다쟁이들은 더 피곤하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입으로는 나라를 세우고 영웅이 되지.
이번 항쟁에서 도만은 이길 수 없어. 어째서? 마이키가 참전하지 않을 거거든, 어쩌면 드라켄도. 왜? 마이키 여동생이 죽을 테니까. 이건 극비야. 간부들은 다 알고 있지만. 도만의 다른 대장들도 칠 거야. 이 몸이 말이야! 천축은 극악하거든. 이기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해. 코코노이 하지메, 너도 그렇잖아? 돈을 모으기 위해선 뭐든지 하잖아. 이누이를 위해서도. 너, 이누이가 소년원에 들어가자마자 흑룡을 배신했지? 상관 없어. 그런 점까지, 이자나는 너를 높이 사니까. 그만 다 잊고 여기서 최선을 다 하는 쪽이 너한테도 좋을 거야. 여기가 네게 맞는 자리야, 코코노이. 천축이야말로 네가 목숨 바쳐 충성할 나라다.
'이누피, 넌 또 잘못된 선택을 했구나.' 겨우 혼자가 된 코코노이 하지메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생각했다. '그야 하나가키는 우릴 이용하진 않을 것 같아, 하지만 지는 팀에서 무얼 하겠다고……. 이기느냐 지느냐 성공하느냐 마느냐 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다는 거야, 바보.'
'하지메는 참 똑똑하구나.'
또 들렸다. 작게 웃는 소리도.
'세이슈도 좀 배우면 좋겠는데.'
틀림없는 아카네 누나다. 목소리, 웃음 소리, 말투, 억양…….
3.
심장이 격하게 두근거린다. 진짜 아카네 누나인가?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돌아보지 마, 하지메.'
머리를 잡힌 듯이 꼼짝 못하고. 호흡이 가빠진다. 시야에 검은 멍들이 폭발하듯 늘어난다. 보고 싶다. 이런 눈으로라도 확인하고 싶다.
'안 돼.'
"왜?"
긴장된 침묵이 공기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팽팽한 끈들이 촘촘하게 이 방 안을 채워, 거미줄에 걸린 듯 움직일 수 없는 느낌. 흥분하고 불안한 마음에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코코노이 하지메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간의 불길이 타오른다, 타닥타닥, 타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아, 시간은 금이니, 하지만,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어떤 수가?'
긴 한숨 소리.
"아카네 누나?"
'싫어.' 곧이어 '상대방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 거야, 하지메.'
전신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던 아카네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찰나에 잘못 본 줄 알았던 불에 탄 작은 발도.
"혹시 화상 때문에? 그런 거 난 상관없어. 어떤 모습이든 좋아. 줄곧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요……."
울음이 터졌다. 그날 작별 인사 할 때의 아카네 누나가 떠올랐다. 바닐라향 날 것 같은 미소. 속삭이듯 낮은 웃음 소리. '이렇게 선명한데, 영영 어디에도 없다.'
'봐.' 살짝 원망이 섞인 슬픈 목소리. '네가 원하는 나는 그렇잖아.' 아카네 누나의 목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안 돼. 절대로. 아직은……, 기다려줘.'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듯이. '흉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이런 나도 여자니까.'
"응……. 알았어."
'약속할 수 있어?'
"응. 약속."
급히 호흡을 가다듬곤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어떤 아카네 누나든 좋아. 그저 아카네 누나가 좋아요. 평생 지켜주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으니까." 눈물이 줄줄 흘러 턱에 맺힌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카네 누나의 작은 웃음 소리. 과거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 있다.
4.
빗소리는 불타는 소리와 비슷하다. 내 안에서 들리는가 했더니 온 세상을 감싸고 있다. 빗방울의 수를 누가 셀까. 하나의 빗방울에 하나의 인간이라면, 이렇게 처박혀 부서지는 것이 우리 고유의 숙명이라면…….
"깼나? 코코노이."
다른 어떤 것도 없다면, 우리 각각의 가치가 저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와 같다면.
"하늘은 맑은데 이상하군."
붉은 특공복을 입은 덩치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코코노이 하지메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침대 모퉁이에 다리를 내리고 앉았다. 시야가 너무 흐려서 고개도 들지 않았다. 바닥에 옷 같은 게 차곡차곡 개어져 놓여있는 것이, 망가져 흑백이 된 텔레비전 화면처럼 보였다. 얼핏얼핏 보이는 붉은 기.
"네 특공복이다. 천축에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로 입어라."
지금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죽으면 다 똑같을 텐데. 불에 타거나, 벌레에게 먹히거나, 물고기의 밥이 되거나……. 그저 시체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인생, 고통을 견디고 비명을 삼키며 우리는 매일매일 흉터투성이로 낡아간다, 잉태되자마자부터 찰나의 단위로 매순간 계속 살아가야 할지 멈추고 썩어가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피곤하다. 무얼 고르든 결국 답은 하나인데.
"그리고 외출 말인데……."
아무 반응이 없자 살짝 내 상태를 염려하는 듯한 기미가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특공복을 입고 천축 대원의 감독 하에 옥상에 올라가는 것까지는 괜찮다고, 허락이 내려왔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라고 말해야 하나. 웃을 기운도 없으니 그냥 삼켜야지. 용건이 끝났는지 덩치는 나가고, 나는 내내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이제 천축 간부들은 목소리만 들어도 전부 아니까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눈 앞 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심하게 탁하다. 꽉 막힌 느낌으로 멍하며, 어지럽고 아프기까지 하다.
코코노이 하지메는 비틀대며 창가로 걸어갔다. 아직 비가 내린다. 하늘이 맑은가? 모르겠다. 짙고 옅은 검은 얼룩들 사이로 희미하게 푸른 색이 비치기는 한다. 그리고 새하얀 태양. 만월보다 창백한 태양. 빗줄기는 처량하게 빛나며 떨어진다. 영혼을 감싸안으며 속삭이는 비의 유언. 아카네 누나의 목소리 같은.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야.'
"응……."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반쯤 닫힌 유리창은 코코노이 하지메의 모습과 방 안 풍경 외에는 아무 것도 반사하지 않았다.
5.
이누피도 이 비를 보고 있을까. 우린 그 세월을 함께 지내며 많은 것을 같이 보았지만, 같은 것을 보진 않았구나. 코코노이 하지메는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비는 투신자살, 그 무수한 충격이 콘크리트 벽을 타고 올라와 직접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 같다. 울리는 건 지면이나 벽이 아니다, 내 머릿속이다.
'하나가키에게서 신이치로의 그림자를 봤다.'
'하나가키에게서 흑룡의 미래를 봤다.'
그 놈의 신이치로, 지긋지긋한 흑룡, 망할 하나가키 타케미치. 전부 꺼져버려라. 땅이라도 갈라져 모두 사라져버리란 말이야. 너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아. 잘 생각해, 이누피. 너를 필요로 하는 건…….
'하지메 뿐?'
부서지는 소리가, 무수히 많은 것들이……, 생명, 정신, 감정, 그리고 모든 것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 코코노이 하지메는 잠시 침묵했다. 크게 뜬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흐린 잿빛 세상에 죽으려고 떨어지는 작디작은 생명들 뿐.
"아카네 누나 뿐이야."
침을 삼키고 다짐이라도 하듯이 한 번 더,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네 누나 뿐이에요, 나는."
머릿속이 꽉 막혀 다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어지러움 속에서 겨우 침대까지 와 엎어졌다. 내내 흐트러져 펼쳐져 있는 이불 속에 몸을 집어넣고 코코노이 하지메는 잔뜩 웅크려 누웠다. 피로까지 겹쳐 이젠 정말 선과 명암 정도만 비치는 눈에 반쯤 열린 창문이 보였다. 닫고 왔어야 했는데 누울 마음이 너무 급해 생각을 못했어. 춥다. 머릿속이 압박되어 아파. 춥다. 다시 일어나야 하는데 안 돼. 춥다. 빗소리 비명 같아 듣기 싫어. 춥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저 하늘이 미워.
"아카네 누나, 미안하지만 창문 좀……, 아. 저, 하지만, 할 수 있으면…… 창문 좀 닫아줘."
뒤에서 어깨 너머로 긴 팔이 뻗어나와 창문을 닫는다. 나무 덩굴 같기도 하고 엉킨 내장 같기도 한 팔이다. 시커멓게 타고 그을려 있다. 멍하니 보며 코코노이 하지메는 아카네 누나 팔이 이렇게 길었나 하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창문까지 거리가 3미터는 될 텐데.
"고마워."
힘없이 말하고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6.
끝없이 밀려드는 숫자들의 흐름에 휘말려 미로에 갇혀 버렸다.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리다 코 앞을 스치는 수열의 뒤를 쫓았더니 화염 속이었다. 그날이다. 끝나지 않는 불길. 여전히 내 속을 채우고 있는 짙은 연기. 옷으로 코와 입을 막고 가쁜 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자 불길 속에서 어떠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날의 나다. 업고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아카네 누나가 아니야. 외쳐도 들리지 않는다. 늘 그렇다. 이 장소에 돌아올 때마다. 세계가 타오르는 소리. 영혼까지 녹여버리는 열기. 이날, 이 안에서, 내 인생도 끝났다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누나, 난 평생 좋아할 거니까."
멍하니 읊었다.
"어른이 되면 결혼해 주세요."
어른이란 뭘까. 이 시간에 머무른 채로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지만, 아직도 어른은 되지 못했다.
"평생 지켜줄게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어른도 될 수 없는 걸까.
'평생이란 말 무섭지.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하지메.'
몸 밖으로 나오자마자 죽어 부패해버린 약속. 온통 붉기만 한 세상에서 새빨간 거짓말이 되어 나를 덮친다. 감싼다. 눈으로, 입으로, 귀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답 없이 울기만 하는 어린 나는 잠들고, 거짓말이 나 자체가 되어간다.
'하지메는 인생의 실패자구나.'
"하나 남은 약속은 반드시 지킬게요."
말하는 동안 서서히 꿈에서 깨어났다. 세상은 더이상 어둡지도 흐리지도 않았다. 검은 반점들은 이미 모두 붉어져 융합되었다. 불타는 것도 같고 핏물에 잠긴 것도 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코코노이 하지메는 자신이 더이상 살아있지 않음을 느꼈다. 몸이 숨을 쉬고 움직여도, 나는 심해에 잠긴 시체, 광대 옷을 입고 보물상자에 묶여 그저 물결에 따라 흔들립니다. 원하는 게 돈이라면 여기 있어요. 마음이라면 여기 없어요. 왕관이든 보석이든 얼마든지 드립니다. 감정은 돈이 안 돼요. 의리도 연민도 우정도 사랑도. 결국은 돈이 승리하는 세상입니다. 돈이 없으면 가장 소중한 것조차 지키지 못해요.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따지는 건 사치입니다. 돈이 없으면 누구도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나의 존재 가치는 돈을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지요. 돈. 돈. 돈. 모두가 저에게 손을 내밉니다. 돈. 돈. 돈. 그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나요? 돈. 돈. 돈. 지긋지긋해, 하지만……. 돈. 돈. 돈. 단순하고 확실하지, 내가 매인 이 줄은.
'너는 어떡할래? 코코.'
끈질기게 달라붙는 이누피의 목소리. 그런 말을 할 때면 언제나 뒤돌아서 있었지. 너도 눈을 맞추고 솔직해질 용기는 없는 거지? 내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 결국 너도 다른 놈들과 똑같잖아.
'아니야. 코코.'
집이 불타는 소리.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가까워져오는 사이렌 소리. 그 속에서도 가장 크게 울렸던 이누피의 중얼거림.
'나는 아카네가 아니야. 세이슈야…….'
이누피를 구한 것이 내 인생의 실수고 실패라면, 나에게 이누피란 어떤 존재일까. 언제나 금세 혼란스러워져 생각을 놓게 된다. 이누피는 이누피야. 열혈바보고, 내가 도와줘야 하고, 아카네 누나랑 똑같이 생겼고…….
등에 바짝 붙은 한숨 소리. '그래. 세이슈도 부르자. 곁에 두고 죽는 한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는 거야.' 속삭임과 동시에 아카네 누나의 두 손이 내 목줄기부터 시작하여 양 쪽으로 뻗어나가 머리 전체를 감쌌다. 눈만 남겨놓는가 싶더니 이내 시야도 덮였다. 어두컴컴한 붉음, 태어나기 전 세상이 이랬을까. 피와 내장에 싸여 그대로 녹아 사라질 것 같다. 형체도 없이. 시작도 없이. '하지메는 없어도 있어. 두려워할 필요 없어. 괜찮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카네 누나? 입을 움직일 수 없어 속으로 말했다. 꿈도 그렇고, 다 들어오는 것 같으니까. 눈 안에, 입 안에, 귀 안에 들어온 건 아카네 누나지? 어쩌다가 그런 모습이 되었어? 상관 없지만. '나는 아카네야. 하지메가 아카네 누나라고 부른 순간부터. 하지메의 기억은 내 기억이니까.' 그렇구나. 역시 아카네 누나야. 다행이다. 당연하지만. '세이슈가 필요한 거지? 그럼 데려올 때까지 기다릴게.' 응. 반드시 데려올게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같이 망가져 가는 거야. 좋겠지?' 그거 좋네. 아카네 누나도, 이누피도, 나도, 하나가 되는 거야. 언제까지고 떨어지지 않아. '죽은 후에도……. 행복해, 하지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행복이란 게 뭐야? 내가 아는 건 빈틈없는 비참함 속에 갇힌 평화로움 뿐인데. 그 무엇도 침투할 수 없고 비명조차 빠져나갈 길 없어 서서히 고요히 죽어버리는. '그게 행복이야.' 아, 그렇구나. 고마워, 아카네 누나. 나는 행복해. 아카네 누나도 행복하고. 이누피도 데려와서 함께 행복해지자. 함께 죽어가자. 함께 기분 좋을 거야.
7.
옥상 문이 열렸다. 동행한 이가 누구인지, 먼저 와 있던 이들은 누구인지, 그런 건 알 수 없다. 끝없이 불타는 하늘, 화염 속 연기 같은 구름……. 온 하늘이 붉다. 공기마저 붉어 숨 쉴 때마다 내부와 외부를 점점 더 진하게 물들인다. 모두의 얼굴도 그저 붉을 뿐.
"이제 마음 정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기에, 코코노이 하지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축 특공복을 입고 여기 왔으니, 그걸로 대답은 됐어. 시선은 한 곳으로 고정되었다. 새하얀 태양. 온통 붉은 중에 홀로 창백한 태양.
"이누이는 필요 없어.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바닥에서부터 아카네 누나의 손이, 아니, 전신인가, 발목을 감고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이내 허리와 양 팔을 속박하고, 목을 조이고, 얼굴을 감싼다. 눈은 가리지 않는다, 이번엔. 굳은 자세로 계속 바라본다. 병든 태양. 죽어가는 태양. 덩굴 곳곳에 꽃봉오리가 돋아난다. 봉오리가 벌어진다. 터지듯이. 진분홍색 꽃이다. 안 쪽이 불타는 것 같은. 타닥타닥 소리가 들린다. 환청일까. 귀 옆에서 피어난 꽃이 말한다. '하지메, 너는 온 세상에 포자를 퍼뜨리는 거야. 네게서 얻는 자는 누구라도 썩거나 불타 또 다른 자를 타락시키고, 그렇게 너는 모든 걸 망가뜨리게 된다. 그게 너라는 존재, 모두가 너를 원하고 너에게서 얻어가게 만들어 주마. 그걸 위해 살아, 이미 죽었지만,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거야. 하지메에겐 그 약속밖에 없잖아?' 아카네 누나의 목소리였다가, 무언가 거대한 존재의 목소리였다가, 다시 아카네 누나의 웃음기 어린 상냥한 목소리. 응, 알았어. 의식이 차갑게 굳어가는 걸 느끼며 코코노이 하지메는 생각했다. 0도에 수렴하는 태양, 망가진 태양이라도, 내겐 그것밖에 없어. 죽어도 반드시 지킬 테니까.
※ 호칭·대사 등은 학산문화사에서 나온 정식한국어판 번역을 따랐습니다.
※ 흔히들 인간 아닌 존재는 자신이 상대하는 인간의 머릿속에 든 것을 들여다보고 과거의 일을 알거나 목소리를 흉내내거나 한다고 하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